가볼만한 곳

백두산과 천지

세상한가득 2007. 8. 17. 15:00
백두산과 천지(북쪽 지역 천문봉)

백두산 북파를 가려면 연길 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그나마 쉽고, 단동이니 심양에서 북파를 가려면 버스로 한 10시간은 족히 가야 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통화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이도백하로 들어가며, 백두산의 북쪽으로 가는 교통편이 힘들다 보니 여행사에서는 대부분 서파만 갑니다.

항공이나 배편으로 중국에 도착해서 환인의 오녀산성을 거쳐서 통화까지 가면 저녁을 먹을 시간입니다. 통화에서 대부분 저녁을 먹고 밤 10시 경에 야간 열차를 탑니다. 위 사진과 같은 곳에서 8시간 정도 보내야 하는데, 자리 배정 후에는 아래칸에 모여서 술 한잔하고 자정(소등)에 자기 침대칸에 가서 잠을 자게 됩니다.

덜컹거리는 3층 침대칸에서 잠이 잘 올리야 없지만 그래도 피곤하다보니 불편해도 어느 새 잠이 들게 됩니다. 이도백하역에는 다음 날, 새벽 6시 경에 도착합니다. 일단 버스를 타고 먼저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하나씩 받아 들고 북파 산문으로 갑니다.

2006년까지만 해도 관광버스로 장백폭포까지도 들어 갔습니다만, 한 1년 전부터는 산문에서 버스를 통제하더니 최근에는 산문에서 먼 곳에 주차장을 만들어 놓아서 그 곳에서부터 내려서 산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최근에는 위 사진과 같이 장백산이란 한글은 아예 떼어 버렸더군요.

셔틀 버스를 타고 짚차 타는 곳에서 내립니다. 1년 전만해도 자기가 탄 짚차를 타고 올라 갔다가 내려와야 했었는데, 이제는 버스 정류장처럼 줄서서 기다렸다가 짚차를 타고 내리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조선족에게 백두산 주변의 모든 자치권을 빼앗아서 길림성 차원에서 운영을 하는지 모든 것이 일사분란 하고 기사들은 모두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백두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천문봉으로 오르는 꼬불꼬불한 길에 속도는 얼마나 내는지 손잡이를 꽉 잡아도 짚차 안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합니다.

천문봉 주차장에 도착하면 위 사진과 같이 우측으로해서 좌측으로 한 바퀴 돌아 내려오게 되어있습니다. 주차장에서 한 100여 미터만 오르면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천지 날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하늘이 맑다가도 금방 구름이나 안개가 드리워서 천지를 제대로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백두산 천지는 천문봉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제일 조망이 좋습니다.

위 사진에서 천지 끝의 우측 3분의 1 부분에 약간 하얀 부분이 서파 지역의 5호 경계비가 있는 곳입니다. 하단의 좌측 사진에서 흰 줄은 북한에서 천지로 내려가는 통로입니다.

천문봉에서 제일 높은 곳(위 좌측 사진)에 오르면 저는 어질어질하고 짜릿짜릿합니다. 천문봉 아래 부분으로 내려 가도 위험하지만 천지를 가까이서 내려다 보려고 많이들 내려 갑니다. 최근에는 더 이상 내려가지 말라고 줄을 쳐 좋았습니다.

천문봉 좌측으로 내려 오면서 천지를 조망하다 보면 천지라고 쓰인 곳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곳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고 짚차를 타고 하산하게 됩니다.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한민족과 백두산]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 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그밖에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 다음 백과사전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