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뿌리를 찾아서 2003.3.19.
청주한씨(淸州韓氏)
중시조는 太尉公(태위공) 韓蘭(한란). 고려 태조 때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한씨는 그 世譜의 출발점을 기자조선(기원전 115년)으로 적고 있다. 기자조선과 마한시대를 지배했던 고왕족의 후예인 삼한
甲族(가문이나 문벌이 아주 훌륭한 집안)이라는 것이다. 한씨는 이처럼 뿌리가 깊으면서도 정확한 연원을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 기자조선은
929년만인 41대 준왕에 이르러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金馬郡(전북 익산군)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韓王이라 했다. 그 뒤 마한도
177년만에 백제 온조왕에게 망한다. 이 때 8대 원왕의 세 아들 友平, 友誠, 友諒(우량)은 각각 고구려와 백제, 신라로 귀의해 우평은
북원선우씨, 우성은 행주기씨, 우량은 청주한씨가 되어 이 때부터 한씨의 성이 비롯됐다.
鮮于, 奇, 韓씨는 모두가 기자의 한 핏줄을 받은
후예로 지금도 통혼을 하지 않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 한우량은 신라 탈해왕조에 벼슬길에 오른 뒤 청주를 본관으로 하고 한씨성을
사용했다고 "한씨세보"는 전하고 있다. 오늘의 청주한씨는 한우량의 31세손인 韓智原의 네 아들 중 한란이 청주한씨의 중시조가 된다. 한씨의 本은
당초 청주를 비롯해 곡산, 평산, 안변, 한양, 당진 등 10여개로 분관했으나 지금은 곡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청주한씨로 돌아왔다.
중시조 한란의 아래 대에서 30여파로 갈렸다. 그 중에서도 번창한 파는 ▲襄節公派(양절공파-한확) ▲文靖公派(문정공파-한계희)
▲忠簡公派(충간공파-한리) ▲夢溪公派(몽계공파-한철충) ▲關北派(관북파-한련) ▲忠成公派(충성공파-한명회) 등 6파로 이를 통칭 "韓氏六派"라
일컫는다. 청주한씨는 중시조 한란이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할 때 종군, 삼한통합을 이룬 공으로 고려 太尉에 올라 왕실과 인연을 맺으면서부터
權門 巨族으로 등장했다.
고려조와 조선 전반기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 고려조에 名人 14, 조선조에 相臣(영의정, 좌.우의정)13,
왕비6, 부마 4, 공신 24, 대제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학자, 문필, 서예가를 남겼다.
조선조 전반기의 韓氏一門은 크고 작은 정치적
변혁과 역사적 사건에서 권력구조의 핵심세력으로써 위세를 떨친다.
조선 개국 초 중시조 한란의 12세손 한상질은 태조의 秦聞使(진문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朝鮮"이란 국호를 전해 받아 온 인물. 바로 계유정난의 주인공 한명회의 조부가 된다. 한상질의 동생 한상경도 이태조의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한씨 중흥을 이룬 거목이다. 이태조 이후 한씨의 번영을 이룬 川寧公(천영공), 文襄公(문양공), 文靖公(문정공),
參判公(참판공), 襄平公(양평공)의 할아버지가 된다.
한명회(韓明澮)는 조선조 한씨 융성의 큰 길을 연 인물이다.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에 가담, 단종과 그 추종세력들을 물리친 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세조에 이어 예종과 성종을 섬기면서
"남이의 옥사"사건 등 4차례의 크나큰 역사적 사건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씨일문이 그에게 힘입어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고 名門世家의
반석 위에 올랐다.
계유정난으로 불리는 수양의 쿠데타와 그 이후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씨일문이 적극 가담해 10촌 이내의 친척만도 17명이
조정 핵심부에 등장한다. 영의정을 비롯해 좌.우의정에 오르거나 판서를 지내는 등 參判(참판)급 이상의 요직에 오름으로써 난공불락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다. 한명회가 영의정, 한확이 좌의정, 한확의 조카 한치형이 다시 영의정에 이어지기도 했다. 그의 아들 보와 딸 넷은 모두 권력의 핵심이던
왕실, 세가와 혼인했다.
맏딸은 세종의 사위인 윤사로의 며느리가 됐고, 둘째딸은 한명회와 함께 수양의 쿠데타 주체세력이었으며 영의정에
오른 신숙주의 맏며느리였고, 세째, 넷째 딸은 각각 예종, 성종의 妃가 된다. 한명회의 손자 한경침은 또 성종의 부마가 되는 등 청주한씨는 조선
왕실과 두겹, 세겹의 인연으로 얽혔다
이같은 확고한 기반 위에서 융성을 구가한 한씨 집안은 또 많은 학자와 문인들을 배출했다. 조선 최대의
명필가 한석봉 역시 韓氏家의 큰 별이다. 그의 이름은 한호, 후기의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서예사의 쌍벽을 이룬 서예가다.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石峰體를 창시, 지금도 그의 "石峰書法", "石峰千字文"이 전해진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제치고…"란 "님의 침묵"으로 이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시혼을 심어준 일제시대의 萬海 韓龍雲은 근세 백년 최대의
불교인이자 민족주의자로서 3.1운동 서명자 33인 중의 한사람이다. 섬세한 언어로 절정의 詩想을 표현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인도의 타고르와
비교되고, 혹은 사라져 버린 그의 호적처럼 승계자가 있을 수 없는 獨存의 경지로 찬탄되기도 한다.
문둥이 시인. 天刑의 恨 속에서 인생의
절망과 슬픔을 담은 "보리피리"의 주인공 韓何雲 역시 한씨의 一門이다. "보리피리 불며, 봄언덕, 고향 그리워 필-닐니리…"
자신의
불행했던 생애를 시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그야말로 보릿대같은 인생이었다.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 경기도청에 근무 중 나병에 걸려 방랑의 길을
나섰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소록도로 가는 길에 읊은 그의 "전라도 길"은 언뜻 황톳길 같은 역사를 걸어
온 이 민족의 비애를 보는 듯하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구한말 참정대신 한규설이 있다. 1905년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등박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보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이완용 등 후세에 이르러 五賊으로 불리는 친일파 대신들에게 대항하여 이를 끝까지
반대했다. 참정대신의 신분으로 일본 헌병에 의해 구금까지 됐던 애국지사이자 정치가로 獨也靑靑했던 그의 기품은 오늘에까지
빛난다.
2,000년 현재 전국에 64만3,000명이 있으며 전북에는 2만8,800명이 살고 있다.
성씨본관별로는 열 번째로 많은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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