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주로 주몽과 부여(夫餘)국, 그리고 고구려와 이곳 `길림시`와의 역사관련 자료들 모아둔 것을 편집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유적과 관련한 사진 자료들은 본 카페 `중국 길림시 사랑모임 http://cafe.daum.net/2026933`의 `길림시 명소 사진 자료실`에 있습니다. 많은 참고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고대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곳 길림시를 사랑해주시고 이 카페의 발전을 기원하여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고조선에 이어 만주지방에 세워진 예맥 집단의 두 번째 고대국가는 부여(夫餘)로서 고구려(高句麗)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부여는 현재의 지린성 지린시(吉林省 吉林市: 길림성 길림시)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기원후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수백년간 지속됐다.
유화부인과 주몽 설화에서 보듯 고구려는 부여와 같은 종족이 세운 나라로 기원전 2세기 무렵 압록강 중류의 만주지역에 성립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동북지방의 두만강 유역에는 옥저(沃沮),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東濊) 등의 예맥 집단이 정치적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들 집단은 처음에는 고조선의 영향 아래 있다가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구려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됐다.
청동기시대 이후 북방의 송화강이나 압록강 유역에는 예맥족이라는 다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여 건국 이전 그 수장이 이미 예왕으로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는데, 기원전 2세기 동명집단과 합쳐 부여를 구성하게 되었다. 부여는 위만조선 대로부터 세력을 형성하고 점차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이즈음 부여 지배세력중 일부가 갈라져 나와 동부여를 건국하고, 동부여의 지배세력 중 주몽계열이 다시 압록강 방면에 진출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백제 건국세력들 역시 부여족이었기때문에 자신들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부여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과 한 계통으로서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그 친밀도가 매우 강하였다. 따라서 부여는 중앙집권화 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직전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한편 부여는 송화강유역의 넓은 들판을 이용한 반농반목의 경제형태를 갖추었다. 부여 사람들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으며, 목축도 성행하여 말?소?돼지?개 등을 길렀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관리들의 칭호를 가축이름에서 딴 것이나 부여의 기마풍습은 부여에서 목축이 성행하였음을 잘 말해준다.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며 이를 중국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고조선 다음 두 번째로 등장한 나라로서, ‘북부여’라고도 하고, ‘동부여’까지를 합쳐 부여로 통칭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부여는 기원전 2세기 북이(北夷) 탁리국으로부터 망명한 동명집단이 예왕(濊王)으로 상징되는 예맥의 땅에 건국한 후,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 이전에 전성기에 이르고, 기원후 494년 물길의 남하로 부여 왕이 부여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전성기 부여의 강역이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그 도읍이 심양~무순에 치소를 두고 있던 제3현도군 북쪽 1,00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중심지는 현재의 길림시(吉林市)에 해당하고, 그 강역은 대체로 제2송화강 중류역의 길림부지대가 된다. 부여는 근 700여년간 존속하였는데, 국호인 부여라는 말은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 또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푸후(puhu)’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부여 국명의 유래가 어떠한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사서에 부여가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민족 관련의 여러 나라와 집단중에서 가장 기름지고 넓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집단으로 출발하였으나 요동의 한군현과의 직접적인 교역과 한군현과 주변집단 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점차 안정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해 나갔으며 이러한 결과 기원후 285년 모용연의 공격이 있기 전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집단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부여의 강역은 대체로 길림중심으로 한 제2송화강 중류역인데, 서쪽으로는 농안(農安)까지, 동쪽으로는 장광재령(長廣才嶺)까지, 남쪽으로는 요령과 길림분수령까지, 북쪽으로는 납림하(拉林河) 또는 제1송화강 중류역까지 이르렀다.
부여는 모아산(帽兒山)과 동단산(東團山) 유적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기원후 2세기대를 전후한 시점에 최고조로 발전하였다가, 기원후 285년 모용연의 공격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져 중국 동북지역 여러 세력중 중심적인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고, 기원후 346년 다시 선비족의 나라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게 되자 급속히 쇠약해져 고구려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급기야 기원후 494년 제1송화강유역 물길(勿吉)의 압박으로 부여 왕실과 일부 백성들이 고구려에 귀의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부여는 멸망하는 과정중 일부 주민이 여러 곳으로 분산 이주하거나 또는 토착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세력들에게 흡수되어 갔다. 즉, 비록 주민의 대부분이 고구려에 흡수되기는 하였지만, 일부 주민은 쇠퇴 멸망과정중 주변의 선비족과 물길족 등의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것이 두막루국(豆莫婁國)인데, 부여 멸망과정 중 일부 주민이 지금의 흑룡강성 서남부지역으로 옮겨가 조그마한 나라를 이루게 되었고, 이들은 부여 말을 쓰면서 기원후 8세기대까지 존속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부여의 중심지는 길림시(吉林市)에 해당하고, 그 강역은 대체로 제2송화강 중류역의 길림부지대가 된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로부터 기원후 4,5세기대 길림중심으로 한 제2송화강 중류역을 부여의 범위로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이 범위 내에서는 비록 부여 말기의 유적군이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길림지역만의 독특한 철기시대 문화인 이른 바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의 유적유물들이 확인되고 있어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부여의 범위를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다.
한편 부여의 최고 중심지(왕성)는 기원후 346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 왕성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중 전기 왕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성(阿城), 농안(農安), 길림(吉林)으로 보는 세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 현도군으로부터의 상대적인 거리와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토대로 길림전기 왕성이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후기 왕성에 대해서는 농안, 창도(昌圖), 서풍(西豊) 등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 문헌기록이 소략한데다 고고학적 증거 또한 충분치 않아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출처: 주간조선
만주 평원의 길은 나즈막한 산자락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짙은 녹색의 옥수수밭 천지에 가끔 싯누렇게 익어가는 메밀밭이 섬처럼 박혀있는 초여름 평원 풍경이 차장 밖으로 다가왔다 사라지곤 했다.
선양(심양) 공항을 내린 답사단은 전성기 고구려의 남쪽 안마당인 남만주에서 북쪽 변경을 향해 달려갔다. 지난 6월 22일이었다. 북쪽 변경은 동북평원의 서북쪽 러시아 접경지대에서 발원한 넌장(눈강)이 동남쪽을 향해 흘러오다 남쪽에서 거슬러 올라온 쑹화장(송화강)과 합쳐지는 쑹위안(송원) 일대. 쑹위안의 옛이름이 부여시였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고대왕조 부여의 고토이다.
이곳을 거점으로 기원 전 2세기에서 기원 후 2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던 부여를 흔히 북부여라고 한다. 이 북부여의 일부가 지금의 옌벤(연변)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는데 이를 동부여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란불, 금와, 주몽 같은 설화적인 얘기들의 무대는 실제로 동부여였다.
그러나 부여의 정통은 역시 북부여에 있었다. "고구려의 시조가 된 주몽이 자신이 넌장 부근에서 내려왔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답사단의 서영수 단국대 교수(한중관계사)가 말했다.
북부여의 고토는 광개토대왕 당시 무주공산이었다. 풍요로운 농경 국가였던 북부여는 이미 모용씨에 의해 멸망했고 그 지역 일대에는 아직 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물길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었던 탓이다. 광개토대왕은 재위기간에 쑹위안 남쪽 수십㎞ 지점에 있는 지린(吉林)북방 전진기지인 용담산성을 건설하고 지방관인 수사를 파견하면서 이곳을 점령했다고 현지의 기록은 전하고 있었다.
부여의 고토를 향해 답사단의 마이크로버스는 선양과 하얼빈(합이빈)을 잇는 선하(심합)고속도로에 올랐다. 동북평원을 남북으로 잇는 이 도로는 그 옛날 고구려의 북방로에 해당했을 것이다. 임지로 가는 지방관, 변방의 역을 마치러가는 병사가 무시로 이 길을 따라 북으로 향해 갔을 것이다. 모피, 농산물 등을 들고 교역에 나선 고구려인들이나 수렵민족이었던 물길인, 반농 반유목 생활을 하며 소금 제조의 비법을 갖고 있었던 거란인들도 소금 등속을 들고 이 길을 따라 무역을 했을 터이다. 전시에는 군사진격로로, 평시에는 교역로로 고구려 제국의 혈관 노릇을 톡톡히 해냈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길 주변의 낮은 산자락 어딘가에서는 벽화에서 나오듯 갈퀴 휘날리는 말 위에서 힘껏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고구려 무사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이 고구려의 북방로는 이제 대륙에 불어닥친 경제 개발의 바람 속에 고속도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선양을 나서자마자 답사단은 이 거대 도시의 벨트웨이 격인 선양환청(심양환성)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길은 다시 선양과 하얼삔을 잇는 선하고속도로(심합고속공로)로 이어졌고, 300여km를 달린 뒤 다시 창춘(長春)에서 지린(吉林) 가는 창지고속도로(長吉高速公路)로 연결됐다. 시원하게 뻗은 왕복 4차선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동북평원을 연결하고 있었다. 건설 초창기의 경부고속도로처럼 도로는 한적했고 달리는 차들의 속도도 고작 시속 50~60Km를 헤아릴 정도로 느릿느릿했다. (중략)
고구려 북쪽 변경의 전진기지인 지린시(吉林市:길림시) 용담산성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그곳에서 답사단은 부여의 젖줄이었던 쑹화장(松花江:송화강)을 처음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지린시 동쪽을 남북으로 흘러가는 쑹화장변에는 부여와 고구려의 역사가 널려 있었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도시 북쪽에 있는 용담산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산책객들의 등 뒤로 동단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그만 야산이지만 군사 요새였다. 병사와 군수물자를 싣고 쑹화장변을 오르내리는 병선들이 이 산성의 감시를 피할 방법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산성 뒤로 부여의 왕궁터가 발굴됐다고 했다.
지금은 용담산공원이 된 용담산성은 첫 입구에서부터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입구에서 "이 성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축조됐다"는 지린성 문물보호당국의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문화재당국이 안내판에까지 고구려라는 말을 써놓은 곳은 이번 답사중 이 용담산성이 처음이자 유일한 것이었다.
곳에 따라 2~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이 웅장하고 둘레의 길이가 2.4km에 이르는 규모도 이 산성이 고구려의 북방 전진기지임을 엿보게 했다.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만든 수뢰라는 이름의 축수지, 땅을 파들어간 뒤 역시 둘레에 돌을 쌓아 범죄자나 포로를 가두는 데 쓴 한뢰, 고구려인의 성벽 축조술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발명품인 배수 시스템 … . 국내성이 있는 지안(집안)에서 1500리 이상을 북쪽으로 올라오는 이곳에서 답사단은 고구려 문화의 진수를 흠뻑 마시고 있었다.
대왕은 이곳에 이 거성을 만들어놓고 물길, 숙신, 말갈 같은 북방의 민족들을 다민족국가의 신민으로 흡수한 뒤 중원의 왕조와 대결할 힘을 길렀을 것이다. 말갈의 전사들은 고구려군의 훌륭한 전사로 변하지 않았는가?
남쪽 성벽 위에 오르면 발 아래로 쑹화장과 그 강변의 너른 들판, 부여 동단산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길이 놓여 있는 발 아래 너른 들판이 고구려 지방관인 수사의 처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답사단에 동행한 교수들이 설명하고 있었다.
한반도 쪽으로는 백제와 신라, 중국 내륙과 동몽골초원 쪽으로는 후연, 거란을 연해주 쪽으로는 동부여와 치열한 정복전을 치른 대왕이 지방관을 직접 파견해 통치한 곳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왜 유독 이 북부여의 땅에 지방관을 배치해 다스리게 했을까?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한 민족이었다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겁니다." 답사단의 서영수 교수는 두 나라의 뿌리가 '예맥족'으로 하나였다는 데서 그 답을 찾았다. 거란과 부여는 고구려 입장에서 다같은 피정복 국가였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고구려인의 시각은 달랐다는 것이다.
다음 날인 6월 24일 답사단은 넌장과 쑹화장의 합수지점을 향해 쑹위안으로 달려갔다. 쑹화장의 넘실대는 물은 거란정복로에서 본 랴오허(요하)나 시라무렌강의 마른 강바닥과 달랐다. '다산릉광택'. 옛 사서는 부여의 땅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쑹화장의 너른 강변은 지금도 풍부한 물산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있었다. 쑹위안의 쑹화장변에는 지금도 곳곳에 어부들이 작은 움막을 쳐놓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강상을 오가는 놀잇배에는 초여름 강바람에 취한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 땅은 또한 풍요로운 유전지대이기도 했다. 쑹위안시의 한가운데로 송유관이 쑹화장을 건너가고 있었다.
대왕의 치세 때도 이 부여의 풍요로운 땅은 고구려 국력의 밑천이 되지 않았을까? 부여라는 어미는 제 몸을 살라 고구려 제국의 기틀이 됐던 것이 아닐까? 소름 끼치는 민족의 인연이 넌장과 쑹화강의 합수지점을 향해 배를 몰아가는 답사단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고조선 다음으로 이어지는 부여국의 역사는 만주지방의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흥하여 수백년 동안이어져 왔으며 오늘날에도 중국 길림시(吉林市)의 송화강 유역에는 부여의 고성과 건물지가 발견되고 있어 당시의 역사적인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것은 중국정사의 기록을 통하여 익히 잘 알려지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첫 머리에 나오는 시조기사(朴赫居世조)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 是爲辰韓六部……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 立爲君焉”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신라의 국가형성에 조선유민, 즉 고조선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민족은 대체로 동일민족이라는 설이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논증되고 있다. 우리가 역사상으로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기록이 중국정사에 보이는 부여, 고구려와의 관계, 고구려, 백제와의 관계기사이다.
이를테면 「三國志」, 「魏書」, 「周書」, 「南史」등 여러 사서를 종합해 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出自하였고, 백제는 고구려에서 출자하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부여족이다.”라고 하는 연역적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민족을 흔히 부여족이라고 하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한편 국내 기록으로 고려시대에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 왕력편에 보면, “고구려 시조 동명왕(주몽)은 壇(檀)君의 자손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고구려나 신라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고 하였다. 이들 기사를 앞에 든 기사와 함께 다시 연역적으로 해석하면 역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단군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차후로 미루더라도 이들 삼국의 민족이 동일민족이라고 하는 의식은 이미 고려시대에는 확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위의 두 사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아마 이와 같은 동일 민족의식이 고려의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역사상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세워진 통일국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후기 신라(이른바 통일신라)에는 오늘날의 한반도의 북부까지 상당부분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지방의 고구려 구토에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건국한 震(渤海)國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정치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통일을 보지 못하고 남북 이국(二國) 상태에 있었다.
이 후 발해가 契丹(遼)에게 망하게 되자,(926) 발해국의 고구려 계통의 지배계급들은 고려로 와서 고려에 의한 민족의 통일에 이바지하였다.
==============================================================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이렇게 전한다.
|
'역사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민족 (0) | 2007.10.11 |
---|---|
[스크랩] 왕건이 짱골라? (0) | 2007.08.08 |
[스크랩] 한국사 연대표 (0) | 2007.07.18 |
[스크랩] 고려(高麗)의 북방 영토는 만주(滿州) 일대였다. (0) | 2007.07.18 |
[스크랩] 경주도읍지는 일제가 조작했다! (0) | 2007.07.17 |